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어머니의 미소”,이고 그다음은 어린아이의 손등”이며, 이어서 “들에핀 백합”, ”하늘에 반짝이는 별”, “쇼팽의 음악”이라는 조사가 있습니다. 이 다섯가지의 아름다움을 상상하면서이들과 충분히 비교되는더 아름다운 한 가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하는 손”입니다. 일하는 손이 아름답습니다.
-정용철님의 “언제나 그대가 그립습니다” 中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읽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고 그리고 예배후 그분과 인사하며 악수한 그 손에서는 어린아이의 손길의 보드라움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남편이 될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손에서는 거친 굳은살이 느껴졌답니다. 그래서 인사하는 자기 손이 부끄럽지 않았다고 그리곤 그 사람에게 자기의 인생을 맡겨도 좋겠다고 생각했답니다.
자주 손으로 인사하는 사람이다보니 이 글을 대하고는 대뜸 내 손을 만져보았습니다. 내 손은 나의 삶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손은 자기가 하는 일을 닮아가고 그 일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농부의 손은 자기가 가꾸는 흙을 닮아 거칠고 투박하지만 정직하고 나무를 깍아 쓸모있는 것을 만드는 목수의 손은 나무의 질감 처럼 조금은 거칠지만 그 또한 적절한 강함이있습니다. 어린 아이를 양육하는 어머니의 손은 그 아이의 보드라운 살결처럼 한없이 포근하고 부드러운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그럼 설교자의 손은 어떤 모양이어야 할지를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며 그 마음을 나누기를 소망하는 사람의 손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그 삶에서 드러내는라 수고하는 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책속에만 사느라 한없이 부드럽기 보다는 그 말씀이 하시는 대로 살기 위해 수고하고 애쓴 흔적이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딸 아이들이 조금 더 어렸을 때에 유난히 손톱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런 저런 색으로 칠하고 또 흉내를 내느라고 저와 갈등이 생길 때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아이들은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에 마음을 두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손의 쓸모에 대해 설교하는 아빠는 참 딸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제야 그 아이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기도 하고 그렇게 한다고 별 갈등이 생기지도 않게 되었지만 여전히 저에게 손은 일을 하고 있을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조금 더 투박하다고 나은것이라거나 너무 곱기만 해서 일하지 않는 손이라는 구분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내가 나의 손을 바라보면서 내 삶의 어떤 흔적들을 남기고 있는지 생각해 볼 뿐입니다.
가끔은 기꺼이 쓰레기를 줍고 치우느라 더러워져도 그 손이 아름답게 느껴지기를 원합니다. 무엇인가를 고치고 누군가를 돕느라고 손에 상채기가 생기고 굳은 살이 만들어져도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게으르지 않아서 손에 게으름의 흔적이 남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삶을 손에 조금씩 새기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신 사랑을 그 손에 새기셨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자를 살리시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그 손에 못자국을 새기셨습니다. 영원히 그 사랑의 자국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삶을 향한 진지함과 내게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낸 흔적이 나의 손에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인생과 부르신 소명을 따라 신실하게 살아낸 흔적을 나의 손에서 발견하기까지 열심을 내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