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런 글을 썼더군요. 예수님의 삶은 마치 나무와 같다고 썼습니다. 아니 나무를 닮았기도 하지만 늘 나무와 관계가 있었고 그 나무를 통해 예수님의 성품을 보여주시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실 때부터 낮고 천한 곳인 말구유에 누이셨고 이 땅에서의 첫 날을 지내셨습니다. 자라면서는 아버지의 목수일을 따라 아마도 나무를 다듬고 깍으면서 여러가지 일들을 하느라 나무와 더불어 사셨으며 그의 대속의 죽음조차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나무를 통해 우리는 참 많은 것들을 배우기도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날씨 계절에도 자기의 잎을 떨굴지언정 무던하게 대지를 지키며 서 있는 우직함이나 겨울에는 몸은 낮추고 여름에는 하늘을 향해 팔벌려 온몸으로 생동하는 유연함을 봅니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되면 어김없이 새 순을 내는 신실함이나 많은 새들이 깃들일 보금자리가 되어주는 푸근함 역시 하나님이 나무들에게 허락하신 은사이겠다 생각됩니다.
어디 나무라고 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살아지기만 할겠습니까? 나무들도 가뭄의 고난이 오기도하고 각종 병충해들이 괴롭히기도 하며 가장 무서운 사람들의 탐욕에 속절없이 잘려나가기도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이 세상은 나무들이 내주는 산소로 호흡하고 우리가 오염시킨 공기를 정화하며 쉴곳을 얻습니다.
우리는 참 많은 가구들이며 생활에 필요한 것들도 나무로부터 얻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열매들로 기쁨을 누리는가하면 나무를 다듬고 짜맞추어서 우리 삶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나무는 다른 재료들과 달라서 그 성질이 부드럽고 또 유연해서 사람들이 사용하기에 참 좋은 재료인 것을 봅니다. 물론 나쁜 목수에 들려지는 것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곳에 큰 나무가 많은 것이 참 좋습니다. 주변에 영향 받지 않고 자기 마음껏 팔을 하늘로 뻗어 자라는 나무들을 보면 참 좋아보입니다.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찬양하는 것 같습니다.
나무들은 자기의 나이를 나이테에 기록하다고합니다. 학자들은 나무들의 나이테를 연구해서 그 시기의 날씨를 연구하기도하고 그 당시의 기후와 지형들을 알아보기도 합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나무가 자기의 몸에 새기는 흔적들 때문입니다.
여름동안 자라던 나무는 가을이 되면 성장을 멈추고 온 몸에 에너지를 줄입니다. 그리고 긴 겨울을 지나는 동안 몸을 움츠려 봄을 기다립니다. 그런 흔적들이 자기의 나이테가 되어 쌓입니다. 그래서 나무들은 자기들이 살아 온 곳의 흔적들을 몸에 담아 두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내 몸에는 어떤 삶의 흔적들이 써지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들이 내 몸에 혹은 마음에 조금씩 쌓여 흔적으로 남고 있을텐데 그 기록들이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김용택 시인이 쓴 시에 “그대를 기다리는 동안”이란 것이 있습니다. 시인은 그 시에서 자기가 “살아온 날들이 꿈만 같”다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그 “살아오는 동안 당신은 늘 내 편이었습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노래하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시를 읽으면서 늘 내 편에 서 있으신 예수님을 떠올렸습니다.
시인의 시는 “어디에서 그대를 기다릴까 오래 생각했는데 이제, 어디에서 기다려도 그대가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로 끝이 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디에서든 언제이든 기다리고 찾으면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흔적 가운데 예수님의 흔적을 함께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고백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