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큰 우상 중 하나가 실용성이지요. 교회에서 토끼 기르기란 그리 실용적이지 않은 일이지만 교회 뒷마당의 토끼들을 보며 ‘그래, 목회하는 것이 참 비실용적인 일이지’라고 마음 속에 다짐하곤 합니다.
21세기에 교회가 왜 어려운가... 생각해보면 실용성 (Practicality보다는 Relevancy(연관성)라고 번역하고 싶습니다.)에 발목이 묶여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가죽을 얻자 함도 아니요, 식용으로 쓰자고 함도 아니요, 그저 주어진 토끼이기에 보살피고 기릅니다. “소명과 목회”의 의미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네요.
가디나장로교회 김성환목사님의 글중에서
이민 목회를 하면서 이런 저런 고민들을 하고 있는 목사님의 글을 대합니다. 비슷한 연배의 목회자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요즘 시대에 실용적이지 않은 일을 하고 있음에 대한 불안함과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는 아니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실용성과는 거리가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간혹 당혹스러운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때로는 목회의 필요를 ‘소망’ 혹은 Vision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그 안에서 힘을 낼 이유를 찾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세운 소망과 비젼이 하나님의 눈과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내 꿈과 소망이 되어 버린것을 발견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해서 아니 우리 교회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소망과 나를 향해 부르신 부르심의 소명을 바로 알지 못해서 내 마음대로 그 목표를 만들어 낼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목표는 결국 실용성이란 이름으로 평가가 되기 마련입니다. 좀금 더 분명한 성과를 얻어 내는 방법이나 시도들을 주목해 바라보게되고 우리가 행하는 일에도 항상 그 평가가 이루어지되 평가의 기준은 그 결과로 산출되는 형식을 거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때로는 그런 산술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오히려 우직스럽게 분명한 결과가 나오는 길을 내버려두고 옛 길을 고집하는 삶일 때가 더 많습니다.
목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회를 통해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분명한 결과를 도출해 내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섬기며 그 믿음 안에서 이 땅의 삶을 신실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성화’는 결코 측정 가능한 수치가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편에서 확인되고 우리는 그 안에서 풍성해져 가는 작은 변화만을 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함께 교회로 모여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그리고 목회를 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앞의 목사님 이야기처럼 ‘토끼 기르기’와 같을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이유와 목표가 없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신실하게 살아 가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친밀함과 교제를 누리는 것, 그러므로 우리 안에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배우고 내게 주어진 것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충성을 배우는 곳이 이 세상일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런던제일장로교회의 삶을 기쁨으로 살아 내기를 원합니다. 아직 어떤 목적지가 있는지 잘은 모르지만 그저 함께 어울려 예배하고 기도하며 서로를 사랑해 나가는 시간들 속에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은혜를 세상에 흘려 내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겨울입니다. 아직 본격적으로 내리지 않은 눈이지만 눈이 오면 불편함을 떠 올리기 전에 아름다움을 먼저 떠 올릴 수 있는 이번 겨울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