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이봉석
올해, 연세가 여든이 되는 우리 교회, 한 교인이 있는데, 평소, 입으로 되 내이곤 하는 말이, “나는 죽는 것은 하나도, 겁이 나지 않는데, 죽더라도, 한 이틀 정도의 여유를 두고 아프다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라는, 소박하면서도, 진심이 담겨있는 소원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된다.
자신이 겪는 고통보다, 가족들, 자식들에게 피해가 돌아갈까 봐, 어차피, 죽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오랫동안 질병과 싸우게 되는 싸움만은 어떻게 서든지, 줄이고 싶어 하는 배려의 마음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죽기 전에, 마지막 작별 인사라도 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싶은 것은, 이 교인, 한 사람만의 소원이 아닌, 죽음을 앞 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소원이 아닐까?
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중에, 출근길, 등굣길의 짧은 이별에서도, 작별 인사를 나누지 못하면, 왠지 허전하고, 아쉬운 생각이 드는데, 이 세상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별이기에,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작별인사를 나누는 작별 의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죽기 전, 이틀간의 여유 있는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내게 될지? 알아보지 못했지만, 짐작컨대, 평소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연락을 잘 나누지 못했던 먼 집안 식구들, 사돈댁 식구들에게까지 작별 인사를 나눌 것 같고, 형제들 간에 잘 지낼 것과 그리고, 자녀들이 그 동안, 용돈 조금씩 주는 것, 쓰지 않고, 아무도 몰래 넣어 둔 통장과 도장을 넣어 둔 비밀 장소를 깜짝 공개하는 것, 등의 일로, 마지막 이틀을 채울 것 같다.
어떤 사람은, 같은 마지막 삶인데도, 다른 사람에 대해, 원망하고, 분노하면서, 기어이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면서, 주변 사람들을 불안케 하며, 지치게 만드는 추한 모습을 보이는데, 마지막 떠나면서, 자신이 그 동안 머물던 자리를 자신의 손으로 깨끗이 정리하고, 가까운 지인들에게 지나온 삶에 대해, 감사하면서,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는 인사를 하면서 떠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황혼녘의 황금 빛깔의 노을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죽게 되는 날짜를 미리 알려주시며, 몸이 아프더라도, 어느 시점에 가서, 단 이틀 정도만 아팠다가 불러 가실 것이라는 정보를 사전에 알려 주시지 않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가 쓴 ‘철새 이야기’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한 철새 무리가 겨울이 되자, 무리를 지어 남쪽으로 날아가게 되었는데, 가는 도중, 가을철을 맞은 벌판에 먹을 것이 많이 널려 있는 것을 보고, 그 곳에 내려서, 먹이를 먹기 시작했다.
추위가 오고, 어둠이 몰려오자, 다른 철새들은 하나, 둘, 떠나가는데, 그 중에 한 마리 철새만은 먹이를 먹는데 정신이 팔려, 하루하루 미루다가, 날씨가 더 추워지고,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그때서야 떠나야 하겠다고,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펼쳐 보았지만, 마음뿐이지, 살이 쪄서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고, 결국, 그 철새는 눈 속에 파묻혀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나 같은 사람도 당연히 포함 되겠지만, 만약, 하나님이 개별적으로 죽게 될 날짜를 미리 알려 주신다면, 자신이 죽게 되는 날, 다다라서 회개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면 된다는 생각에서, 허구한 날, 하나님 떠나, 방탕하게 지낼 것이 뻔해 보인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예정해 주신 죽음의 날이 가까워 졌을 때, 정신을 차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 보려고 하지만, 먹이를 먹는데 정신을 팔다가, 결국 시기를 놓친 채, 목적지를 향해, 떠나지 못하고 죽은 철새처럼 되고 만다는 것을 불을 보듯, 빤히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그 불행을 허락하실 리가 만무할 것이다.
현재 고난은 장차, 천국에 들어가 누릴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데, 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또 다시 상급학교로 진학 하듯이, 우리 인간의 죽음, 또한, 허무와 절망으로 끝나는 마침이 아닌, 천국을 향한 삶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통과의례에 불과함을 평소, 믿고 산다면, 어느 때, 어떤 모양으로, 부름을 받는다 할지라도, 불평하거나, 의아해 하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 갈릴리마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