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둘째주~넷째주 말씀묵상 나눔 자료
2013.02.12 13:44
2월 둘째 주
시편 8편
1. 시인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기억하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며 그분의 이름을 찬양합니다(1-4절).
1) 시인은 무엇을 찬양하고 있습니까?(1절)
‘주의 이름’입니다. 만물에 나타난 그 이름의 권능과 위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벅찬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찬양하면서 이 시를 시작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시인은 스스로 존재하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주권자인 하나님 ‘여호와’가 우리를 선택하여 자기 백성으로 부르시고 ‘우리 주’가 되셨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그 이름을 송축합니다. 여기에서 주의 이름은 주의 임재를 대신하는 표현이고, ‘아름답다’(히, 앗디르)는 말은 본래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로, 한 나라의 왕이 좌정할 때에 느낄 수 있는 ‘위엄이나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말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온 땅에 주의 임재로 말미암은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함을 느끼며 감탄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온 땅뿐만 아니라 하늘 위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시인은 ‘주의 이름’과 ‘주의 영광’을, ‘온 땅’과 ‘하늘 위’를 병행시켜, 장엄하고 아름다운 만물을 통해 구현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 그리고 통치와 섭리를 묵상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만물 앞에 서면, 역사 앞에 서면,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친밀함을 볼 수 있고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작고 미약한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찬미, 마 21:16)을 통해 무엇을 하십니까?(2절)
그들의 찬미를 통해 주의 대적, 즉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케 함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십니다.
시인은 전혀 비교되지 않는 두 대상, 즉 ‘어린아이들과 젖먹이’ 그리고 ‘원수와 보복하는 자’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어린아이’는 온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앞에서 작고 보잘것없는 자신을 인정하고, 그 인간을 높이고 다스리는 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며 높이는 사람입니다. 또 연약한 자로서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들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의 찬미를 통해 자신을 힘 있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모르고 무시하고 대적하는 자들, 즉 ‘원수와 보복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또 무력하게 하십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위엄과 권능을 온 천하에 드러내실 것입니다. 시인은 지금 하나님이 지으신 땅과 하늘, 그리고 사람만 본 것이 아니라 ‘역사’를 보고 있습니다. 죄와 불의가 관영한 세상 속에서도 어린아이 같은 이들의 찬미를 통해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통치와 역사’를 찬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자신이 새롭게 창조한 백성을 통해 역사 속에서도 이 세상의 혼돈과 죄악의 세력을 이기시는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장엄하고 아름다운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를 묵상하던 시인은 또 무엇을 생각하며 감격합니까?(4절)
위대하신 하나님이 아주 작고 초라한 인간을 기억해주시고 돌보아주신 것을 생각하며 감격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바라보던 시인의 시선은 이제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에게로 향합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 앞에서, 또 장엄하고 광활한 창조 세계 앞에서 시인은 한없이 보잘것없고, 미약하고, 유한한 자신의 실상을 발견하고 인정하며 고백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시나이까?” 이것은 의문문이 아니라 감탄문입니다. 시인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관심과 사랑을 벅찬 감동과 감격과 감탄의 마음으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생각하다’(히, 자카르)는 말은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을 의미하는 미완료 시제로서, 인간은 하나님을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인간을 결코 잊지 않고 항상 기억하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또한 ‘돌보시다’(히, 파카드)는 말은 고난과 시련에 처한 자기 백성을 찾아와 돌보신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미완료 시제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권고와 돌보심이 계속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요컨대 시인은 하나님의 ‘기억하심과 돌보심’을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인간을,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돌아보시고 돌보심으로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찬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시인은 인간에게 주신 존귀와 인간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를 묵상하며 그분의 이름을 찬양합니다(5-9절).
1)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영광스러운 지위와 사명(특권)은 무엇입니까?(5, 6절)
인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그리고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시인은 첫 사람 아담과 노아 그리고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다스리라’는 통치권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미약한 인간을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참여하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신 한없는 은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인간의 존엄함’을 나타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는 존재로 살도록 지음받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인간의 지위와 역할이 피조물들 중에서 매우 특별하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을 버렸고,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마저 거부하며 부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지위와 온 세상 피조물의 참 주인으로 살도록 주신 특권은 ‘그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모습’(히 2:6, 7)으로 보냄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우리에게 회복되었고 이제 그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몸이 부활하여 하늘 영광에 이를 때 온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2) 이 시편은 동일한 어구로 시작하고 마무리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1, 9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 8편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시편 8편은 ‘여호와의 이름’(1절)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여호와의 이름’(9절)을 찬양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2-8절)에 하나님께서 그 이름의 능력으로 인간을 통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시인이 전하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 가져야 할 태도와 삶은, 하나님의 역사와 그 이름의 아름다움을 묵상하며, 이를 송축하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당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세우셔서 천지 만물에 대한 대리 통치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 앞에서 시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경이와 경탄에 마지않으며 주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이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2월 셋째 주
시편 14:1-7
1. 시인은 하나님이 없다고 큰소리치는 어리석은 자들의 실상과, 이 땅에 사는 인생들의 진상을 보여줍니다(1-3절).
1)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실상은 어떻습니까?(1, 4절)
그들의 마음은 부패하고 그들의 행실은 가증하며 선을 행하는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대적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며 위협합니다.
시편 14편은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의 어리석음과 오만함과 방자함을 드러내는 시편입니다. ‘어리석은 자’로 번역된 ‘나발’은 단지 지식과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기보다는, 피조물의 지위를 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그들의 생각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서도 무시합니다. 무신론적 오만함을 가진 자들의 생각은 ‘왜곡’되었고, 마음은 전적으로 ‘부패’했으며, 그들의 소행은 ‘가증’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악을 품고 악을 행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4절) 어둡고 부패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적으로 부정하면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악을 자행했습니다. 여기에서 ‘가증하다’(히, 타아브)는 말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도덕적, 육체적, 영적 더러움’을 망라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지혜 문학에서 ‘어리석음’의 반의어는 ‘지혜’가 아니라 ‘인자함’(헤세드)입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자는 인자함이 없고 언약 관계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자로서 의인과 경건한 자를 위협합니다. 그들의 부패함과 가증함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을 향한 협박과 약탈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위협적인 말과 무자비한 행동으로 ‘떡 먹듯이’ 아무런 죄책감 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혔고, 하나님이 보시지도 않고 상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제멋대로 횡포를 부렸습니다. 이를 인해 시인은 애통하며 주의 정의와 구원을 간청합니다.
2) 하늘 보좌에서 인생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으십니까?(2절)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를 살피시고 찾으십니다.
1절에서 ‘하나님이 없다’ 하는 무신론자들이 만연한 현실과 실상을 다루었다면, 2절은 이러한 세상을 굽어살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인생 위에 군림하여 권세와 권능을 휘두르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 아래 사는 인생에게 관심을 두시고 살피시는 분입니다.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앞에 인생은 그 어떤 것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존재를 지우려는 어리석은 자들의 오만함과 부정함(1절)뿐 아니라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누구인지도 다 아십니다. 여기에서 ‘지각이 있다’(히, 사칼)는 말은 바르게 생각하고 지혜롭게 판단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단어가 ‘하나님을 찾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된 것은 바른 사고와 신중한 판단을 갖고 있다면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단지 지적인 추구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알고 그를 섬기며 살아가는 것을 함의합니다. 또한 언제, 어느 곳에 있든지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도덕적으로 ‘선함’을 추구하고, 모든 인간관계에서 ‘인자’와 ‘공의’를 구현하는 삶입니다.
3)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고 오만한 인생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3절)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인생을 친히 살피신 후에, 하나님은 어리석은 인생들이 그릇된 길로 치우치고 무리 지어 타락하며 그 중에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십니다.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었다’는 말은 모든 인생이 하나님이 정하신 바른 길에서 벗어나 부패하고 완악해졌다는 뜻이며, 또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어리석고 오만한 인생은 필연적으로 불의하고 부정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더러움’이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심히 오염되고 부패한 상태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표현(욥 15:16)입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인간의 전적 타락과 무능을 묘사하는 표현으로서 하나님을 찾는 자도, 선을 행하는 자도 전혀 없다는 현실 인식과, 동시에 이런 참담한 실상에 대한 탄식과 책망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노아 홍수 직전의 세상이나 심판 직전의 패역한 소돔을 연상케 합니다.
2. 시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인들의 무지와 멸망을, 그리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기도와 소망을 피력합니다(4-7절).
1) 하나님의 백성을 위협하던 악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유는 무엇입니까?(5-6절)
하나님이 자기 백성, 즉 의인의 세대 가운데 계심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또한 가난한 자들(의인)의 계획을 좌절시키려던 악인들은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의 보호자와 피난처가 되신다는 사실에 당혹감과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1-4절에서 ‘하나님이 없다’ 하는 어리석은 자의 실상을 다루었다면, 5-7절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의인의 최후 승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고 의지하는 의인들과 함께하시며 악인에게서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리석고 오만한 악인들에게는 두려움을 주심으로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이 곤경에 처한 자기 백성을 위해 또 힘없고 의지할 것 없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나서실 때, 그들을 괴롭히고 멸시했던 악인들에게는 ‘큰 두려움’이 임할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는 직역하면, ‘그들은 두려움을 두려워하였다’는 뜻입니다. 즉 크게 두려워하였다는 뜻입니다. 이전에 자기 백성의 원수들을 황공(惶恐)하게 하셨던 하나님이, 이제 이스라엘 안에 기생하고 있는 악인들에게 두려움으로 임하십니다. 악인은 그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결국 두려움 가운데 살고, 의인은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서 평안함을 누릴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해하려고 했지만, 의인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강력히 보호하며 지키시는 하나님을 보고 소스라치게 당황하며 두려워할 것입니다.
2) 시인은 악인들이 횡행하는 상황 속에서 무엇을 소망하며 기도합니까?(7절)
시온에 계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즉 자기 백성을 포로 된 곳에서 돌이켜 구원의 기쁨을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없다’ 하는 무신론자가 만연하고, 선을 행하는 백성이 하나도 없으며, 의인들이 위협을 당하는 악한 시대를 바라보면서 탄식했지만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시온에서 나올 이스라엘의 구원을 소망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기에서 ‘시온’은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신 곳입니다. 온 세상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좌정하시는 거룩한 도성입니다. 시온은 여호와의 언약궤가 있는 ‘성전’이 있는 곳으로, 온 세상 통치의 중심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 온 세상을 향한 의로운 통치, 하나님에 대한 호소와 찬양이 실현되는 중심입니다. 시온에 계신 하나님은 때가 되면 자기 백성을 사로잡힘과 압제에서 구원하셔서 기쁨과 즐거움을 되돌려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이루셔서 이스라엘의 운명이 역전될 날이 올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을 주심으로 이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2월 넷째 주
시편 18:16-29
1. 다윗은 환난 중에 자신을 건져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주시고, 언약에 충실히 살아온 자신을 늘 지켜주셨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합니다(16-24절).
1) 하나님은 다윗을 누구에게서 건져내셨습니까?(16-17절)
흉용한 바닷물처럼 급습해오는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들에게서 다윗을 건지셨습니다.
16-19절은 대적과 원수로 인해 부르짖은 시인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행적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처럼 신속하게 강림하신 이유는 당신의 권능으로 원수의 손아귀에서 그를 건져내어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단락에서 계속 반복되는 표현들(손을 펴다, 붙잡다, 건져내다, 인도하다 등)은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하나님이 다윗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16절에서 ‘많은 물’은 다윗을 파멸과 죽음으로 몰고가는 수많은 대적들이나,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홍해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시듯, 엄청난 급류에 휩쓸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듯 위경에 처한 다윗을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들에게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래서 17절에서 다윗은 자신을 압제하는 자들의 강함과 자신의 연약함을 대조하며, 하나님의 구원이 없었다면 자신은 결코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2) 재앙의 날에 이르렀지만 다윗이 안전한 곳으로 구원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18-19절)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께서 다윗의 의지가 되어주셨고, 여호와께서 다윗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재앙의 날’은 다윗이 처한 위급하고 위태로운 상황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악인들은 다윗이 심각한 어려움에 빠져있을 때 그를 더 큰 곤경에 빠트리려고 먹잇감을 향해 달려드는 야수들처럼 급습합니다(‘이르렀다’). 하지만 다윗이 재앙을 당할 때 악한 원수들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셔서 다윗의 의지와 피난처가 되어 그를 보호하며 지켜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벗어나 넓고 안전한 길로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환난당한 자신을 더욱 혹독하게 공격하는 악인들의 비열함과 무자비함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의 의지가 되어주셨기에 능히 이길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건짐받은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인 자비와 사랑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기 백성에게 때로는 시련과 환난당하는 것을 용인하시지만, 그들이 완전히 넘어지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이 다윗에게 상을 베푸신(구원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21-23절)
하나님의 도를 저버리지 않고 늘 자기 앞에 두고 지켰으며, 하나님을 떠나는 악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언약에 충실한 삶(‘의’)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재앙의 날에 강한 원수의 손에서 자기 목숨을 건져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정결한 삶을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이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받은 것은 주의 말씀을 저버리지 않고 지켜서 죄를 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때때로 외면하고 싶을 때에도 말씀의 요구를 피하지 않고 가까이했기에 악에 치우치지 않고 언약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가 말하는 ‘완전’은 자신의 완벽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일 것입니다. 또 다윗이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것은 자기가 전혀 죄가 없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으며 자신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삶을 추구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다윗은 끝까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오직 주님의 처분에 자신과 모든 것을 맡기고 말씀을 따라 주님만 의지하여 의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2. 다윗은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를 알고 의뢰하기에 더욱 담대히 적진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25-29절).
1) 다윗은 하나님이 무엇을 따라서 사람들을 대하신다고 고백합니까?(25-26절)
자비로운 자에게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는 듯,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사람들을 대해주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따라 사람들을 상대하십니다. 자비하시고 완전하시고 깨끗하신 당신의 성품 그대로, 자비를 베풀 줄 알고 완전하며 깨끗한 마음을 품은 이들에게는 마땅히 받을 대접을 받게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자비한 자는 하나님의 자비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한 자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깨끗한 자는 하나님의 깨끗하심을 깨닫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악한 자, 즉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고의로 왜곡하고 거스르는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심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이 의를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이고,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완전하신 분임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종종 세상은 의인의 알 수 없는 고난과 악인의 흥왕함을 목격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성품과 반하는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행한 대로 받게 하실 것입니다.
2) 적진을 향해 두려움 없이 달려가고 어떤 장애도 뛰어넘을 수 있는 다윗의 담대한 용기와 신앙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입니까?(29절)
대적들보다 더 강하고 언약에 늘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뢰하는 데서 온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구원을, 28절에서 ‘빛과 어둠’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묘사했다면, 29절에서 전쟁에서 적들을 제압하는 용사의 이미지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 승리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앞서 다윗은 환난을 당하여 죽음의 물결에 휩싸였고, 멸망의 급류와 사망의 올무에 매여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에 처해있었지만 이제 그는 적들의 공격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적진을 향해 달리며 적의 성벽까지도 뛰어넘는 용맹함을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다윗이 의인을 보호하고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자기 백성에게 모든 시련을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주를 의뢰하니 두려울 것이 없었고 하나님을 의지하니 어떤 장애물도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담대하고 용기 있는 신앙은, 더 나은 삶의 조건이나 환경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댓글 0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
188 | 여름 단기선교를 위한 Coffeehouse | lfkpc | 2013.04.15 |
187 | 부활절 축하 유년부 발표회 | lfkpc | 2013.04.07 |
186 | 선교바자회(4/13일 토요일) | lfkpc | 2013.04.02 |
185 | Coffeehouse for Mission | lfkpc | 2013.04.02 |
184 | 고난주간 특별 새벽예배 | lfkpc | 2013.03.21 |
183 | 주일학교 겨울성경학교(March Break) | lfkpc | 2013.02.28 |
182 | E.M March Retreat(3/11~13) | lfkpc | 2013.02.28 |
181 | 3월 첫째, 둘째 주 말씀 묵상 나눔 자료 | lfkpc | 2013.02.28 |
180 | 베드로 남선교회 헌신예배 | lfkpc | 2013.02.21 |
179 | Ben Fehr 선교사님께서 주일학교를 담당하십니다. | lfkpc | 2013.02.21 |
» | 2월 둘째주~넷째주 말씀묵상 나눔 자료 | lfkpc | 2013.02.12 |
177 | 2월 첫주 말씀묵상 나눔 자료 | lfkpc | 2013.02.06 |
176 | 제직수련회 | lfkpc | 2013.01.30 |
175 | Ben Fehr 선교사님 어머님 장례일정 | lfkpc | 2013.01.14 |
174 | 금요기도회가 새로워집니다. | lfkpc | 2013.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