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첫째, 둘째 주 말씀 묵상 나눔 자료
2013.02.28 11:58
3월 첫째 주
요한복음 10:7-16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0: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0: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으로 비유하십니다(7-10절).
1) 양의 문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양들이 얻고 누리는 것은 무엇입니까?(9절)
누구든지 그 문으로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들어가고 나오며 풍성한 꼴을 얻게 됩니다.
10장의 비유(‘목자와 양’)는 안식일에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사건과 관련하여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9장)에 대한 예수님의 최종 답변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이 참 목자이신 하나님(겔 34장)을 만나는 유일한 문(7절)이요 또 친히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자(11절)라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여기에서 ‘양의 문’은 양들의 신변이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고 풍성한 꼴이 마련되어 있는 ‘양의 우리’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를 말하며, ‘들어가며 나오며’라는 표현은 양들이 향유할 온전한 자유와 안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만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요(14:6), 생명과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이요,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1:51)이십니다.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 풍성한 신적 생명 즉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릴 수 있습니다(‘구원, 풍성한 꼴’). 요컨대 사람을 생명과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며, 동시에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을 알게 합니다. 그 문은 ‘누구든지’ 즉 주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 문의 출입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오는 자는 절도요 강도입니다(1절). 도적이 침입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반면에, 목자가 양들을 찾아온 목적은 무엇입니까?(10절)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데 있지만,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문이 아니라 다른 데로 넘어온(1절), 예수님보다 먼저 온(8절) ‘절도와 강도들’은 누구일까요? 어떤 학자들은 1세기에 나타난 거짓 메시아들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본문의 맥락에서 본다면 눈뜬 맹인을 배척하여 회당에서 쫓아낸 바리새인과 같은 유대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9:39). 문을 통해 들어오지 않는(1절,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그들은 성경이 약속한 메시아를 죽이려 했고 그 메시아를 영접하는 이들을 위협했던 영적 소경들이요 거짓 목자들이요 어둠의 사람들이었습니다. 10절에서 삼중적인 반복(‘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을 통해 도적이 오는 목적 즉 그들의 실체와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삼킬 자를 찾기 위해 두루 다니는 마귀(벧전 5:8)를 연상케 합니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자처했지만 실상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양 떼를 기만하고 가진 것을 빼앗으며 그들을 오도(誤導)하여 멸망으로 치닫게 했던 도적과 삯군들이었습니다. 거짓 목자들이 ‘죽음과 멸망’을 가져왔다면, 예수님은 ‘생명’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공급하시는 ‘생명의 풍성함’은 요한복음이 기록된 목적이자 핵심 주제입니다(20:31). 특히 동사의 반복(‘얻게 하고, 얻게 하려는’)과 시제(현재)를 통해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신적 생명이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시작하여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이고, 충분한 만족을 줄만큼 ‘풍성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2.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로 비유하십니다(11-16절).
1) 양들을 향한 참 목자와 삯군의 태도는 어떻게 다릅니까?(11-13절)
① 참 목자(11절) - 자신의 양이기에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② 삯군(12,13절) - 자기 양이 아니기에 이리가 오면 양들을 돌아보지 않고 버리고 달아납니다.
참 목자와 거짓 목자의 구별은 양 떼를 향한 태도와 관계에서, 특히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 정체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삯꾼은 돈을 받고 고용된 사람을 뜻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양들’이 아니라 자신이 받을 ‘임금’에 있습니다. 삯군은 양떼보다는 자신을, 양들의 안전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고 판단하기에 위험이 닥쳐오면 언제라도 양떼를 버리고 달아납니다. 자신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요 자신이 참 목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선한 목자가 목숨을 걸고 자기 양 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으면서도(1:11) 자기 백성을 사랑하여 자발적으로 목숨을 내어놓으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세상의 권력자(삯꾼)는 양들을 이용하고 착취하다가 손해가 날 것 같으면 버리고 도망하지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을 살리기 위해 희생을 ‘자취(自取)’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목숨을 버린다’라는 표현(능동적)은 예수님의 자발적인 의지를 나타내는 표현으로서,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 권력에 의한 억울한 희생이 아니라 자기 양떼를 살리기 위한 예수님의 자발적인 죽음이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자발적인 자기 포기였습니다. 하나님과 양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2) 예수님이 양들에게 선한 목자인 이유는 무엇입니까?(14,15절)
첫째, 목자는 자기 양을 잘 압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아시듯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십니다. 둘째,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대속은 이를 증명합니다.
예수님은 11절에 이어 14절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이 ‘선한 목자’이심을 명시적으로 선언하십니다. 선한 목자이기에 누구보다 자기 양들을 잘 알고, 양들을 위해서 목숨도 아끼지 않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거룩한 사랑과 사귐을 양들인 우리와도 누리시려고 즉 풍성한 생명을 나누어주시려고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은(14절)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상호 깊은 신뢰와 친밀한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앎을 말합니다. 그리고 ‘내 양’(헬, 타 에마)은 직역하면 ‘내 소유들’인데, 이것은 목자와 양들 사이에 분리할 수 없는 ‘하나 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삯꾼은 임금을 목적으로 하는 계약 관계에 있지만 목자는 양들을 소유하는 목양 관계(언약)에 있습니다. 양 떼를 자신의 생계 수단이 아니라 자기 삶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함께 살아가는 삶의 대상이자 목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 안에 있기에 위기의 순간에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양을 향한 목자의 사랑은 억지가 아닌 자발적인 사랑이며, 자기 양을 한 마리도 잃지 않고 다시 찾는 온전한 사랑입니다(18절). 이 사랑을 아는 만큼 주님을 알게 되고 영생도 풍성해질 것입니다. 내 영혼 깊은 곳의 갈급함은 선한 목자를 아는 지식과 그분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3) 목자이신 예수님이 관심을 갖고 있는 또 다른 대상은 누구입니까?(16절)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 즉 이방인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유대인과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 지역이나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 제한되는 목자가 아니라 ‘이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까지 인도하며 돌보시는 우주적인 목자가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요 3:16)을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밖의 양들도 자신의 소유임을 분명하게 밝히며, 자신이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주를 믿는 이방인들의 목자도 되실 것을 알리십니다. 사랑과 긍휼로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민족에게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 ‘한 백성’을 이루어 ‘한 목자’에게 있도록 이끄실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정통 유대인들은 물론 제자들까지도 이 말씀을 선뜻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뿌리박혀 있던 선민의식과 배타적인 사상을 무너뜨리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는 신적인 당위(‘반드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서 예수님의 이방인 선교 사명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께 받은 명령이었고 예수님은 스스로 이 뜻에 순종하십니다. 지금도 이 순종의 사랑을 통해 우리 밖의 양들을 목자에게 인도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가 전도와 선교에 헌신해야 할 이유는 이 세상에 아직도 ‘우리 밖에 있는 다른 양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주
요한복음 12:20-30
12: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12: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12: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12: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12: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12: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1. 예수님은 헬라인들이 자신을 만나기를 원한다는 소식을 듣자, 이제 자신이 영광을 얻을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20-24절).
1)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1절) 방문했던 헬라인들은 빌립에게 무엇을 청합니까?(20-22절)
빌립에게 예수님을 뵈옵고자 청했고, 빌립은 안드레와 함께 이 사실을 예수님께 전합니다.
‘온 세상이 예수를 따른다.’는 바리새인들의 탄식(19절)은 헬라인들까지 예수님을 만나러 온 사건에서도 입증됩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헬라인 몇이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빌립에게 예수님과의 만남을 요청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책잡고 죽이려는 데 혈안이었지만 헬라인들은 예수님을 자발적으로 찾아왔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11) 이방 민족인 헬라인들은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헬라인의 예수님 방문은 이제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할 때(11:52)요, 유대인의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을 불러 한 무리가 되게 하실 때(10:16)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총 안에서 차별 없이 한 백성, 한 가족이 되게 하여 영광을 받으실 날이 온 것입니다.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될 것을 내다보게 합니다.
2)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23절)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대답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 헬라인들의 접견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아직 ‘인자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셨는데(2:4, 7:8,30, 8:20), 헬라인들의 방문 소식을 듣고는 이제 ‘때가 왔다’고 선언하십니다.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이제 이 우리(이스라엘)에 들지 않은 양들(이방인)까지(10:16) 구원하기 위해 자신이 십자가를 지실 때가 다다른 확실한 증거로 여기신 듯합니다. 온 세상의 지지와 헬라인의 접견 요청을 받았던 예수님은 지금이 세를 결집시켜 로마를 몰아낼 때가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을 살릴 때이며 그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을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아셨고, 더불어 이를 통해 나타날 영광스러운 결과들을 내다보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을 가져오는 ‘십자가의 죽음’을 무엇에 비유하십니까?(24절)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로 비유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듯이, 자신이 죽어야 세상을 살릴 수 있고, 이것이 인자(人子) 예수님이 영광을 얻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란 요한복음에서 자주 나오는 관용구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적 권위를 가지고 어떤 중요한 진리를 선포할 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에서도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의 비유를 통해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 즉 ‘십자가에서의 대속적인 죽음’이 갖는 의미를 밝히기에 앞서 이 관용구를 사용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한 알의 밀’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고, ‘많은 열매‘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영혼들을 가리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이 죽지 않고는 그분께 속한 모든 백성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많은 열매’ 즉 수많은 영혼들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참된 생명과 자유를 누리고 주의 백성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지혜를 찾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처럼 보였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이 땅에 생명과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능력이요 지혜였습니다(고전 1:23,24).
2. 제자의 도를 교훈하신 후에, 예수님은 자기 소명을 따라 십자가를 감당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25-30절).
1) 예수님은 자신을 섬기는 제자들에게 어떤 삶을 요구하십니까? 또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25,26절)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처럼,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듯이, 그런 제자들을 존귀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대속적인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시고는 동일한 원리를 제자도의 원칙 즉 주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자기 부정의 교훈’을 가르치셨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구속이 없듯 자기 부정이 없이 제자로서의 삶은 불가능하고 어떤 열매도 거둘 수 없다는 뜻입니다. 죽음에 순종하여 삶을 얻을 것을 확신하며 골고다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계셨던 예수님처럼, 제자들도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미워할 때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가 계신 곳에 있어야 진정으로 섬기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를 섬기려거든, 예수님의 십자가 곁일지라도 예수님이 계신 곳에 제자들도 있어야 합니다. 어떤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세상에 굴복하지 않으며 주와 주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지키는 자가 제자(‘주를 따르고 섬기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듯이 하나님이 그런 제자들을 존귀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주와 주의 말씀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삶이 생명의 길입니다. 땅에 속한 내 자아가 죽어야 내 삶에서 사랑과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죽어야 살고, 버려야 얻고, 낮아져야 높아지는 것이 진리임을 확증해 줍니다. 그런데 어려울 때 스스로 자신을 지키려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외면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한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2)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님의 심정과 기도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하늘 아버지는 어떻게 응답하십니까?(27,28절)
이 십자가의 때를 면하기를 바랄만큼 괴롭고 힘드셨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십자가를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고백하시며,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이에 하나님은 순종하는 아들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은 임박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죽음의 의미와 관련된 교훈(23-26절)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데 이어, 번민 가운데 깊이 탄식하시며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에게도 눈앞의 십자가는, 면할 수 있으면 면하길 바라는 고통스럽고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신 것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스러워지는 것이었기에 또 그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아셨기에 순종할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라고 고백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셨는지 즉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고 겸허하게 순종을 다짐하십니다. 하늘에서의 소리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며,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인준이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세례 받을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란 하늘의 음성이 공생애 시작 시점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히심으로 이후 수행하실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임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이제 남은 십자가 고난과 부활 및 승천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을 예고하며 천명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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