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주일의 유래
김요환목사
청교도들이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중 반 이상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었습니다. 게다가 남아 있는 사람들마저 해마다 겹치는 흉년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도무지 밝은 전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금식 기도를 선포하고 경건한 이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 이 상황을 돌보아 주십시오.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를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땐가 또 한번 대단히 어려운 형편에 놓이게 되자 그들은 다시 금식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금식 기도를 놓고 의논하는 자리에서 어떤 농부 한 사람이 이렇게 제의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금식하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달리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비록 농사가 흉년이 들고 형제자매들이 병으로 쓰러지는 어려움을 겪지만 이 가운데서도 우리가 감사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식량이 풍족치 않고 여건이 유럽보다 편안하지는 않지만 신앙의 자유가 있고 정치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광대한 대지가 열려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금식 대신에 감사 기간을 정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농부의 그 말은 참석한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금식 기도 주간을 선포하는 대신 감사 주간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이 감사주일의 기본 동기인 것입니다.
옥함음 목사님의 '고통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추수를 감사하는 감사절은 그 유래에 대해 여러가지 설들이 있고 이야기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너무 풍족함으로 감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란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통하여 감사하는 것은 이미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의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 감사를 되새기는 일이 이 가을에 추수를 통하여 고백되어지는 것일 겁니다. 이제 추수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추수감사주일'은 어떤 의미에서 그저 일년중에 지나는 행사에 지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나에게 주신 은혜를 돌아보고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일년간의 삶을 그래도 참아주시고 여전히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하거나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살면서 영광 돌리기보다는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떠나서 나의 생각대로 나의 마음대로 살아가는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참으시기를 그치고 우리의 하는 삶의 행위대로 대응하여 갚으시고 벌하신다면 오늘의 감사주일은 아마도 감사보다는 철저한 회개의 주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저 그대로 우리들을 놓아두시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새삼 깨닫습니다. 굳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까지 가지 않아도 이미 나의 삶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만하거나 혹은 그저 일반적인 삶의 행태 속에서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심판받지 않고 유보해 두고 계신 것만 생각해도 얼마나 큰 감사가 있는지요.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참으로 오래 참으시는 것을 감사합니다. 당신의 그 온유하심으로 우리를 지키심을 또한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간절한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선하신 뜻을 우리에게 여전히 이루시기를 기뻐하심을 감사합니다.
나의 어리석은 요구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시며 져주시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지키시고 또 나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 드립니다.
나의 입술의 감사가 나의 삶에 주신 것을 인함이 아니라 나의 삶에 아직 유보해 두신 것을 인하여 시작되고 나아가 나에게 여전히 허락하신 은혜와 축복을 바라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나의 눈을 들어 주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하나님의 은혜와 주신 것들을 감사하는 오늘의 예배가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