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기쁨과 웃음
김요환목사
일전에 우연히 인터넷에서 본 한국의 어떤 광고에서 人生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80년을 산다고 가정하면 그 삶중에서 26년을 잠자는데 쓰고 21년은 일하는데 사용한답니다. 또 9년 동안은 먹고 마시는데 쓰고 이런 저런 일로 사용하는데 비해서 겨우 우리가 웃음으로 사용하는 시간은 20일 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하더군요.
우리가 평생 동안 웃고 있는 시간의 총합이 겨우 20일 남짓하다는 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아마 민족별로 개인별로 편차가 심하겠지만 가뜩이나 웃는 것에 익숙하지 않는 우리 민족들이고 보면 우리의 웃음의 시간이 그보다 결코 길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웃음에도 여러 종류가 있을테지만 나의 마음을 즐겁게하고 기쁘게 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면서 웃는 웃음이야말로 참으로 소중하겠다 싶습니다.
내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지면서 웃는 웃음이며 아이들과 함께 놀면서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또 괜히 만나면 좋은 사람과의 약속을 앞두고 기대하면서 미소짓는 그 시간들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웃음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건강하고 기쁘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합니다. 웃음으로 그 스스로에게 생기는 에너지 뿐만 아니라 삶의 격려와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테지요.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우리의 웃음은 나를 행복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의 웃음을 바라보는 그 누군가를 또한 힘있게하고 즐겁게 하기도 하고 그의 인생을 격려하고 축복하기도 할겁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숫자만큼이나 자기 자식의 갓 태어난 미소를 최고의 행복으로 바라본 시간들이 생겨났을 것이고 연로하신 부모님이 나로 인해 웃으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벅찬 감동을 느끼기도 했을 것입니다.
웃음으로 표현하는 서로의 삶에 대한 축복과 격려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저 말없이 웃어만 주어도 나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그 사람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따뜻하고 평화로운 사랑과 아버지의 묵묵하고 깊은 울림은 또 다른 의미에서 나의 삶을 격려하고 축복하는 듯합니다. 우리들의 삶에는 이렇듯 나의 얼굴에 웃음을 웃게하는 만남과 또 관계들이 있습니다. 나의 아픔을 웃음으로 바꾸어 주는 친구들도 있고 나의 기쁨을 환희로 바꾸어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의 삶이 가능하다면 많은 이들에게 나를 만나고 관계하는 이들에게 웃음을 주고 축복을 선사하는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이 말하고 격려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잠시 미소를 띄우는 웃음으로 격려하고 힘을 북돋을 수 있다면 참으로 나의 삶이 의미롭겠다 싶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쓰면서 “기뻐하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생각하면 “기뻐하라”는 말이 먼저 떠오르는지 모릅니다.
바울은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고난 가운데 있는지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 가운데서도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고 격려해 주었던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감사하는 편지를 쓰면서 그들에게 기뻐하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의 기억속에서 빌립보 교회를 떠올리면 자신의 험악한 환경-감옥 가운데 투옥되어 있는-에 개의치 않고 웃을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자기의 아픔과 고난을 잊지 않고 함께 아파하고 헌신해서 돕는 그들을 인해서 바울은 또한 고난 가운데서도 웃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하면서 기뻐한다고 또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바울을 웃게하고 기뻐하게 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구원 받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죄인의 괴수로 스스로를 고백하는 바울이 아무런 이유없이 아무런 공로없이 자기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을 알게 되고 나서는 이렇게 기쁨을 주체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아프지 않고 왜 힘겹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고백하기를 그 어떤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기쁨이 내 속에 충만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이 또한 이렇게 기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말하기는 이 구원의 기쁨에 대하여 참 많이 말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그 기쁨을 누리고 사는 이들이 많이 없음을 봅니다.
우리의 삶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으로 올리신 예수님의 구원을 이미 받았으므로 우리 기뻐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 구원의 감격을 이제는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앞에서 방긋 웃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첫 웃음을 보는 것 보다 훨씬 실제적으로 그 구원의 감격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기쁨이 우리의 삶을 격려하고 또 축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기쁨은 아이들의 웃음을 만드신 분이신 그분의 주시는 최고의 기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