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님이 만들어 오신 민들레 무침을 먹으면서 그 쌉싸리한 맛에 기분이 좋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그림같은 꽃씨를 날리는 민들레이지만 이곳 캐나다에서는 그저 잡초로 취급을 받습니다.
요즘 각집마다 민들레를 뽑거나 치우느라고 애들을 씁니다. 그런데 들판 가득 피어 있는 민들레를 보면 그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을 만큼 참 장관입니다.
누가 잡초를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쩌다가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지 못해서 “잡”자를 이름 대신 붙여 살고 있다’고 말입니다.
사실 잡초란 없습니다. 각기 하나님이 만드신 이름이 있고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나 효용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해서 그렇지 많은 풀들이 먹을 수 있기도 하고 심지어 약효를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다 알지 못하기에 또 내가 그 풀의 이름을 알지 못하기에 내 마음대로 잡초라고 부를 뿐입니다. 나야 쉽게 부르는 이름이지만 그 풀들은 내심 섭섭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끔 풀들을 꺽거나 베다가 보면 그 풀들에게서 나는 향기가 있는 것을 봅니다. 민트나 쑥같이 특별한 향을 지닌 것들도 있고 그렇게 특별하진 않지만 그래도 나름 향을 내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어떤 풀도 베이면서 아무런 향기를 내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시인들은 그 풀들이 내는 향기를 맡으면서 그 향기가 바로 풀이 당하는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내는 삶의 향기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자기가 꺽기고 잘리는 아픔을 당하는 와중에도 자신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풍겨 내는 것을 보면 참 풀들이 가진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풀들 뿐 아니라 나무도 그래서 나무를 자르면 나는 향기는 우리 마음을 평안하게 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나뭇잎을 태우거나 나무를 태우면서 우리는 그 향기를 맞으며 행복해 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고기 굽는 냄새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향기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저는 나무가 내는 향기, 풀이 품어 내는 냄새가 참 좋습니다.
그것이 비록 시인의 말처럼 상처를 이기는 풀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꺽는 이의 손에 상처를 입히거나 복수를 하기 위해 독을 품어 내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향취를 내어주는 그 모습이 좋습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죽이려고 고함치고 조롱하는 이들에게 소중한 피를 흘려 주시며 그들에게 죄사함의 용서를 구하셨던 예수님은 그 상처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내신 분입니다.
나는 어떤 향기를 내고 있는지를 아니 어떤 냄새가 나고 있는지를 생각합니다. 내가 고통을 당할 때는 고사하고 칭찬을 받거나 대접을 받을 때 조차도 향기가 아닌 악취를 풍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억울한 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바로 튀어나오는 분노와 섭섭함, 그리고 입으로 얼굴로 다 드러내는 향기롭지 못함을 떠올립니다.
내일을 걱정하며 나에게 주어진 것이 별로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 속에서 울려나오는 절망과 다른 이들을 향해서도 스스럼 없이 보여주는 우울함과 슬픔들 역시 그리 향기롭지는 않습니다.
늘 향기를 품어내진 못하더라도 가끔은 내 삶이 향기를 내는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꺽어도 그에게 복수의 칼날을 세우기보다 그 손에 나의 향기를 베게 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다다르기 힘겨운 곳이지만 오늘은 그곳을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