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광야를 지나며”라는 찬양을 듣고 불렀던 적이 있습니다. 히즈윌이란 팀이 부른 찬양입니다. 여러 사람이 찬양을 불렀고 또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미국 청년이지만 한국에 와서 공부하면서 길거리에서 찬양 사역을 하는 죠셉 붓소라는 청년의 찬양은 여러 의미에서 마음을 움직입니다.
무엇인가 의지하고 기댈 것이 없는 시기를 지나거나 아니면 때로 홀로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이 우리의 삶을 덮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가 보지 못하는 많은 것들과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만큼 홀로인 것 같을 때 “광야에 서 있는” 것 같다고 표현합니다.
한 번도 광야에서 홀로 있어 본 적은 없습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사막에 가본 적도 없어서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이나 중국의 고비 아니면 남미의 아타카마 사막을 가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다. 안되면 언젠가 미국 남부에 있는 모하비사막이라도 가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아마도 생각처럼 낭만적이지만은 않을 겁니다. 목은 마르고 더운 기운에 지치게 되면 손바닥만 한 그늘이라도 찾게 되고 시원한 물 한 모금이 절실할 겁니다.
그제야 시원한 에어컨의 바람이 있는 집이 그리울테고 냉장고 문을 열고 차가운 물을 한 컵 마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 소망이나 기대가 극단적으로 간절해지면 아마도 그 처절함이 하나님을 향한 기대와 간절한 기도로 바뀔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인생의 광야는 그보다 더욱 힘겨워서 글로 쓰기에 부족한 시간이자 미안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지나는 이들에게는 그 시간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겨운지 모릅니다. 아무리 그 시간을 지나온 적이 있다고해도 정작 오늘 바로 그 시간을 이들에게는 미칠 수 없습니다. 각자 자기가 만나고 지나는 광야가 가장 어렵고 힘겨울 겁니다.
광야를 지나면서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런 어려움의 시간을 지날 때 원망과 분노로만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그 시간이 오히려 하나님을 찾고 묵상하며 더 깊이 만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숱한 믿음의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함으로 더 풍성한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었음을 발견합니다. 성경뿐 아니라 지난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서도 또 우리들 주변의 믿음의 형제들 가운데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사례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지나는 광야의 시간이 힘겹지 않다거나 지날만 하다거나 한것은 아닙니다. 또 그들의 고백이 은혜롭다고 해서 그들이 지나는 시간을 웃음으로 바라 볼 수 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 때문입니다.
우리는 광야를 지나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우리를 지켜보시고 함께 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변에 의지 할만한 것들을 찾지 못하거나 내려 놓을 수 있게 되면 비로소 하나님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우리의 눈이 하나님을 바라 보지 못하기에 그 임재와 동행을 누리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은 광야에 서서 하나님과 단 둘이 만나는 꿈을 꾸어봅니다. 다른 어떤 것들이 주는 감정들에게서 떨어져서 초라하게 하늘을 향해 눈을 든 나와 그 하늘 위 위엄과 영광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꿈을 꾸어봅니다.
이 여름 넓은 캐나다의 밤 하늘을 비추는 달과 별빛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묵상해 보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