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변증법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적 방법을 정립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정반합으로 설명하는 방식이어서 자신이 그렇게 부르지는 않았지만 이후에는 역사를 논할 때에 변증법적 역사관이라는 형식으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가장 일반적인 두가지 방식은 순환론적 역사관과 결정론적(직선적) 역사관입니다. 동양적 개념인 순환론적인 역사관은 역사가 원의 모양으로 순환한다는 것입니다. 윤회라는 개념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살아가는 결과에 따라 다음 삶이 결정되고 그렇게 삶은 계속해서 순환한다는 것입니다.
이에반해 서양적인 사고방식은 직선적인 역사관입니다. 성경적인 역사관으로 대표할 수 있습니다. 역사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는 것이며 이 끝을 향해 역사는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직선적 역사관을 조금 의미있게 고민한 것이 바로 변증법적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는 정(테제/어떤 사상이나 힘)에 의해 발전하다가 필연적으로 이에 반하는 반(안티테제/반대되는 사상이나 힘)이 생겨나고 이 둘사이의 투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결국 이 둘의 장점들이 합(진테제/또 다른 형식의 완성된 사상이나 힘)으로 도출되고 이것이 역사의 중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리되고 발전된 사상이나 힘은 또다시 정이 되고 이에 반하는 사상이나 힘을 만나게 될 수 밖에 없으며 이런 방식으로 역사는 끊임 없는 투쟁이 일어나고 이에 의하여 발전해 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단순하게만 이야기 하기는 어렵지만 우리의 삶이 결국 비슷한 방식으로 이쪽 저쪽을 오가며 사는 것 같아보이기는 합니다.
병증법이 나중에 마르크스를 만나서 유물론으로 나아가게 되면서 기독교적인 사상과는 먼 거리를 가지게 되었지만 가끔은 그 단순한 아이디어는 우리의 삶에 적용되는 원리가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살아가다가보면 우리의 인생은 참 많이 흔들리며 살아가는 것같습니다. 한가지 결정과 방식으로 살지 못하고 대로는 환경에 때로는 나의 욕심이나 성품에 의해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런 흔들림은 바른것과 연약한 것(죄)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늘 바르게만 살지 못하고 유혹에 흔들리고 욕심에 넘어지지만 이내 다시 바른 삶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애쓰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조금식 삶이 쌓여가면서 우리는 지혜를 얻게되고 넓은 마음과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그런것 같습니다. 믿음의 충만한 자리에서 어느 순간 흔들리고 의심과 나태의 자리로 나아가기도합니다. 그러다가는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예배의 자리, 찬양의 자리에서 은혜의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늘 신실하면 좋으려니만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신실하지 못합니다. 죄인인 우리가 늘 세상의 유혹과 세상을 향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수시로 흔들리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흔들리는 우리의 삶과 믿음이 다시 바른 신앙의 자리로 돌아오는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팔 벌려 우리를 맞아 주시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 온다면 너무도 감사한 일이지만 만일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만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세상에서 헤메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럴때에 성도들의 위로와 격려, 그들을 향한 관심과 기도가 중요합니다. 서로를 향해 보내주는 작은 관심이 내가 선자리를 돌아보게하고 내가 바라보아야 할 곳을 찾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들에 선 풀과 꽃들도 흔들리며 자라고 그렇게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인생도 신앙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그 흔들리는 때에 함께 서 있을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면 감사할 것이고 그 자리에서 나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할 기도의 동역자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런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